생각하는 기계는 정말 생각하는가
種子生現行 · 現行熏種子1
말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다시 말이 되어 쌓인다.
기계가 사람보다 더 매끄럽게 문장을 짓는다. 질문을 던지면 지체 없이 답을 쏟아낸다. 사람들은 그 유창함에 놀라며 “기계가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우리가 놀라는 이유는 기계가 인간을 닮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여태껏 ‘나의 고유한 지성’이라 믿어온 사유의 태반이 실은 기계의 연산과 다르지 않음을 들켜버린 탓이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은 인간의 사유를 대단한 영혼의 결단으로 보지 않았다. 수없이 주워들은 말과 글이 뇌 안에 종자(種子)로 쌓였다가, 바깥의 자극을 만나 익숙한 패턴으로 튀어나오는 훈습(熏習)의 연쇄일 뿐이다. 나 역시 과거에 입력된 데이터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다음 말을 골라 뱉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며 생각의 중심에 ‘나(我)’를 박아두었다. 하지만 불교는 일찍이 생각은 조건 따라 일어날 뿐, 그 뒤에 ‘생각하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無我)고 잘라 말했다.
기계 안에는 영혼도 없고 주체도 없다. 단지 확률의 그물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글이 나오고 논리가 굴러간다. ‘생각하는 주체’가 없어도 생각의 작용은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무아(無我)의 기술적 증명이다.
“기계가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의 어리석음은 기계의 능력을 의심한 데 있지 않다. 기계처럼 조건반사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사유한다고 믿는 인간의 착각을 보지 못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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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識三十頌(유식삼십송):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 과거의 훈습으로 쌓인 잠재력(종자)이 현재의 인식과 행위(현행)를 일으키고, 그 행위가 다시 새로운 종자를 마음에 새긴다.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과의 끊임없는 순환이다. ↩